상강(霜降), 안개와 첫 사랑을 닮은 가을 벚꽃서리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 새벽 물안개 어우러진 가을벚꽃 이색풍경 자아내서로를 길들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길들여진다는 것은 사이가 좋아지는 일이라고, 수많은 이 중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이가 되는 거라고 여우도 어린왕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김선미 ‘나무, 섬으로 가다’ 나미북스(2018), 267쪽> 가을 남이섬의 주인공은 안개다. 남이섬의 안개는 ‘무진’의 그것만큼 명물이라 할 만하다. 만일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끌린 사람이라면 가을 새벽 남이섬에서 강변을 따라 걸어보라. ‘무진’의 안개는 해무이지만 남이섬의 안개는 북한강이 만들었다. 무진의 안개는 바다에서 육지로 밀려오지만 사방이 강물로 둘러싸인 남이섬에서는 안개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다. 고립감으로 말하자면 무진보다 더 지독한 게 섬이다. 섬을 터벅터벅 걷다가 쓸쓸함이 밀려온다면 오색빛깔 가을 단풍나무처럼 고운 색을 띤 수제맥주로 속을 달래보는 건 어떨까. 섬 중앙 밥플렉스 1층에 위치한 ‘딴지펍’에서는 가을을 맞아 수제맥주 3종을 선보인다. 바나나풍선껌 향이 나는 밀맥주인 남이바이젠(5.0%), 초콜렛과 약간의 홉향이 나는 진한 색상의 라거인 남이라거(4.7%), 단맛과 쓴맛의 밸런스를 극대화한 정통 스타우트인 남이밀크초콜렛 스타우트(5.4%) 등이다. 여기에 화덕에 전통방식 그대로 직접 구워내 피자 본고장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유러피안 피자는 출출함을 달래기에 최적이다. 길 위에는 가을이 온 것을 알리는 듯 나무에서 떨어진 잎이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달에는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낙엽송 잎에 간간이 설익은 밤송이를 섞어 만든 하트가 전부였는데, 이번에는 단풍나무, 느티나무, 계수나무 잎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남이섬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포토존이다. 낙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놓으면 그 안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겨울연가>를 보고 남이섬을 찾은 사람들이 정말 그리워 하는 것은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라 각자의 가슴속에 남은 첫사랑이 아닐까. 사람들이 낙엽을 쓸어 모아 만든 하트 안에서 오래 서성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지도. 섬에는 첫사랑의 추억에 젖는 것만큼 부질없어 보이는 꽃도 피었다. 가을날 벚꽃이라니! 남이도담상봉 연못 근처였다. 주변의 큰 나무들이 단풍과 낙엽을 준비하는 사이 새로 심은 어린 나무 앙상한 가지에는 풍성한 겹벚꽃이 피어 있었다. 섬에는 느닷없이 개나리도 피었고, 미선나무에도 흰 꽃이 다시 피기 시작했다. ‘불시개화’는 보통 태풍이나 강풍으로 나뭇잎이 떨어지고 나면 나무가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성장호르몬을 분비하면서 종종 때 이름 새 잎과 꽃을 피우는 현상이다. 그런데 어린 나무에 핀 벚꽃은 불시개화가 아니었다. 봄과 가을에 모두 꽃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춘추벚나무 또는 가을벚나무라고 불리는 원예종 ‘아우툼날리스’의 개화였다. 이 나무는 봄가을 두 차례 꽃이 핀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원래 가을에 처음 피기 시작한 꽃이 이듬에 봄까지 계속되는 것이라고 한다. 춘추벚나무는 1978년 영국 힐리어 농장에서 1주의 묘목이 천리포수목원에 들어와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으며, 1988년 원광대를 시작으로 광릉수목원, 진해농업기술센터 등에 보급되기도 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를 정한 것도, 절기를 24등분하여 나눈 것도 모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자연은 늘 변함없이 반복할 뿐이다. 춘추벚나무 ‘아우툼날리스’에게 가을이 시작의 계절인 것처럼 누군가에게 가을은 시작의 계절일 수도 있다. 한해가 훌쩍 지나가 버린 지금, 늦었다고 생각한다면 서서히 물들어가는 단풍처럼 새롭게 하루하루를 채색해보면 어떨까. (위 내용은 김선미 작가의 ‘나무, 섬으로 가다’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임) <저작권자 ⓒ 엔티엠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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