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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광주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진정한 화합을 추구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고은영 | 기사입력 2015/05/28 [01:36]

아직, 광주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진정한 화합을 추구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고은영 | 입력 : 2015/05/28 [01:36]

<사진/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27일, 지난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간 전개됐던 광주민주화운동이 막을 내린 날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후 35년이 지난 2015년, 아직도 광주의 아픔은 끝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참혹했고 비극적인 5.18, 이성을 벗어나 정권을 잡기 위한 '광기'에만 사로잡혔던 신군부의 계획에 의해 진행됐던 비극의 이날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명이 살아있는 이 시대 모든 국민의 의무이다.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는 광주의 비극은 광주 시민만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뼈아픈 과거이다. 지난 역사의 비극을 되새기고 진정으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과 끝을 다시 한 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이다.  

1980년 5월 13일, 서울에서 군부의 정치참여를 반대하며 대학생들이 대규모 서울역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을 들은 광주의 대학생들은 14일, 15일 가두 시위를 벌였고, 이는 16일까지 이어졌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의 시위가 소강 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5월 18일 0시 5분께, 정동년 등 광주지역의 복적생과 총학생회 간부들이 예비 검속되고 1시께, 광주 일원에 공수부대가 투입되는가 하면 각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전날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18일 오전,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대 앞에 모인 대학생들을 강제 해산해씨만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자 공수부대원은 시내 전역에서 시위진압 작전을 벌였고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총칼로 찌르는 등 잔혹 행동을 하자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경악했으며 이는 오후 4시 이후부터 자위권 차원에서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서게 된다. 결과적으로 계엄군의 이날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불렀으며 19일, 시민과 학생이 연대해서 저항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19일 오전, 잠시 소강상태였던 광주 일대는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이 군과 경찰에 맞서 공방전을 벌이면서 충돌이 격화되었고, 공포에 빠졌던 시민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를 벗어나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계엄군도 시위대의 저항에 놀라면서도 시위대를 포위하여 무차별 구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했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는 최초로 발포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됐다.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20일 오전에 그쳤으나  오후 6시,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해 도청을 지키는 군과 경찰을 압박해 나갔다.

시위대는 전라남도 도청을 지키는 군경을 포위하고 접전을 계속하였으며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정보도를 못하였던 MBC와 노동청, 세무서 등이 시위대에 의해 불탔다.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광주 전 지역이 시민의 손에 장악되자 궁지에 몰린 공수부대는 20일 밤 11시께, 시위군중을 향해 집단발포를 감행하였다. 이때부터 발포에 의한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실탄을 지급받은 계엄군들이 총구를 시민과 학생들에게 향해 발포하자 시민들도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21일 오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군용차량을 탈취하였다.

계엄군은 정오부터 도청에서 시위대에 조준사격을 시작했고, 시민들도 무장을 위해 오후 1시께부터 화순.해남.나주 등 광주의 인근 시외지역에 진출하여 무기를 탈취하였고 농민도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날 오후 3시부터 시민들에게 무기들이 지급되면서 계엄군과의 시가전이 시작됐다. 학생시위가 시민봉기로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력항쟁으로 전환된 것이다.

10일동안의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중에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긴 날이었다. 결국 21일 오후 5시부터 8시사이에 계엄군은 광주에서 외곽지역으로 퇴각했다.

5월 22일, 도청을 탈환한 시민군은 학생.시민.종교인.도청간부까지 참여한 수습대책위를 구성했으나 혼란한 상황에서 광주시민의 요구를 수렴하기보다는 미온적인 태도로 계엄사령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원상복구와 사태회복에만 주력해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런 수습대책위의 모습에 일부 시민은 무기를 반납했으나 일부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강.온 대립을 낳았다. 강경파 학생들은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수습대책위를 비판하고 25일 밤 10시,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자처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투쟁위는 매일 광주시민들이 모이는 규탄대회를 열고 계엄군의 즉각 사과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막을 내리던 27일 새벽, 계엄군은 2만 5천여명의 병력으로 광주의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 등을 앞세워 대대적인 무력진압을 감행했다.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뒤 오전 5시 22분, 전원 연행됨으로써 광주지역은 다시 계엄군의 손에 넘어갔다. 계엄군은 아침 7시 30분께부터 밤 10시 50분까지 가택수색을 벌여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상무대로 연행하면서 짧았지만 길었던 10일간의 항쟁은 끝을 맺었다.


1995년 7월 18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의 발표에 의하면 확인된 사망자는 193명인데 이 중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이고 부상은 852명으로 확인되었으나 행불자 등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더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35년동안 아직도 아물지 않은 광주의 비극적인 상처는 매년 5월이 오면 되살아나고 있다. 더욱이 보수정권이 '임을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금하면서 광주시민과 광주를 기억하는 국민들에게 아직도 생채기를 내고 있는 것도 또 다른 아픔이다.
<사진/신대식 인뉴스 팀장>

<고은영 기자/koey505@nav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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