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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3월 7일] 1945년, 미군 레마겐 철교를 점령하고 라인강을 건너다.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3/07 [00:00]

<오늘의 역사>[3월 7일] 1945년, 미군 레마겐 철교를 점령하고 라인강을 건너다.

김종현 | 입력 : 2010/03/07 [00:00]

1945 년 3월 7일, 독일 라인란트팔츠 주 레마겐에서 미국 9 기갑사단 B중대가 아직 폭파되지 않은 루덴도르프 철교를 점령했다. 처음으로 철교로 라인강을 건넌 병사는 알렉산더 드라빅(Alexander A. Drabic) 중사였다.

루덴도르프 교(Brueke der Ludendorff)는 독일 라인란트팔츠 주 레마겐(독일어: Remagen)에 있던 철교로, 라인 강 사이의 레마겐과 에르펠(Erpel) 을 잇고 있었다. 루덴도르프교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에 착공하여 1919년에 완공했는데 원래 목적은 서부 전선 독일군에게 철도로 각종 군수물자 및 병력을 수송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완공하기 전에 전쟁이 끝난데다가 그 여파로 주변 철도 또한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철교로서보다는 인도교 역할을 하고 있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철교였다.

1945년, 서방 연합군이 라인강으로 접근하자 독일군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라인강의 다리를 적절한 시점에 폭파하여 연합군의 라인강 도하를 막으려고 시도했다. 물론 지연시키는 것에 불과했지만. 루덴도르프 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독일군은 공병대를 동원하여 다리 폭파를 준비하고 있었다. 1945년 3월 7일 오후 1시 30분, 벌채 작전(Operation Lumberjack)의 일환으로 라인 강을 공략 중이었던 미국 9 기갑사단 30수색대대 소속이었던 에버트 버로즈(Evert Burrows) 소위는 독일군의 동태를 살피려 레마겐 쪽 언덕을 올랐다가 멀쩡한 루덴도르프 교를 보게 되었다. 버로즈 중위는 즉시 이 사실을 사단 사령부에 보고했고, 9사단은 급히 M-26 퍼싱 전차와 함께 카를 팀머만(Karl Timmermann) 중위의 중대에 다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군이 다리로 쇄도하는 사실을 안 라인강 동쪽 에르펠의 독일군 수비대는 서둘러 다리를 폭파했지만, 상판만 날아갔을 뿐 다리는 멀쩡했다. 다리 폭파에 실패한 것은 폴란드 실레지아 출신 공병들이 일부러 도화선을 끊어놓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전차를 앞세운 미군의 공세에 독일군 수비대는 후퇴했고, 1945년 3월 7일 오후 3시 10분에 미국 9 기갑사단은 붕괴하지 않은 루덴도르프 교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공격에 참가한 미군 중 제일 먼저 다리 끝에 도착한 병사가 알렉산더 A. 드라빅 중사이다. 드라빅 중사는 서부 전선에 참전한 미군 중에서 가장 먼저 라인강을 건넌 병사가 되었다. 장교 중에서는 카를 팀머만 중위가 첫번째였다.

3월 8일까지, 미국 9 기갑사단, 78 보병사단, 99 보병사단 등 총 8,200명이 라인 강을 건넜다. 그러나 전차와 중장비는 철교를 이용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독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연합군이 폭격했었던데다가 3월 7일 점령 과정에서 독일군의 폭파 시도 또한 철교를 약화시킨 상태였다. 전차와 중장비는 철교 옆에 따로 설치한 부교로 건너가야 했다. 결국 33월 17일 오후 4시 30분경 붕괴했다.

이 다리가 서부 전선에서 미군 작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패튼의 3군이 라인강을 도하할 수 있을 만큼 부교를 건설하는 시간만큼은 단축시켜준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군과 연합군의 사기를 드높여줬다는 점이다. 영국과 미국은 라인강 도하를 누가 먼저 하느냐를 놓고 패튼과 몽고메리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던 중이었고, 라인강은 독일의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에 이곳을 돌파했다는 점은 전쟁을 곧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을 높였던 것이다.

독일측의 충격은 커서 루덴도르프 교 폭파 실패의 희생자는 고위직에서 나왔다. OB West 사령관게르트 폰 룬트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원수가 자진 사임 형식으로 경질당한 것이다. 룬트슈테트 대신에 서부전선을 맡게 된 사람은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하던 알베르트 케셀링(Albert Kesselring)이었다. 실무 책임자들 또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고, 교량 폭파 임무를 맡았던 독일군 공병대의 장교들 및 공병 20여명은 친위대에게 총살당했다.

나중에 라인강 동쪽, 그러니까 독일군 수비대가 있던 망루 2개는 현재도 남아 있지만, 철교 자체는 재건되지 않았다. 건설 직후부터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 지역은 현재 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이 공원은, 1945년 당시 레마겐 시장이었던 한스 페터 퀴르텐(Hans Peter Kuerten)이 주도하여, 독일 정부 지원금 10만 마르크로 1976년부터 주변 환경 정비, 기념 조형물과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벌여 1980년에 레마겐 평화 박물관을 세웠다. 이제 루덴도르프 교는 유명 관광지로 바뀌어 많은 참전 용사들과 관광객이 찾고 있다. 한때 이 석조 망루에는 "9 기갑사단의 공적으로 발에 물을 적시지 않고 라인 강을 건너다"(Cross the Rhine with dry feet courtesy of 9th ARME Division)' 라는 명판이 붙었는데, 이 명판은 켄터키 주 포트 녹스(Fort Knox)의 조지 패튼 박물관(George Patton Museum) 에 전시되어 있다. 9 기갑사단은 조지 패튼의 3군 소속이었다.

1957년 미국 작가인 켄 헥슬러(Ken Hechler)는 루덴도르프 교를 주제로 한 《레마겐의 철교》 를 발표했고, 이를 토대로 1968년 존 길러민[각주:1](John Guillermin) 이 《레마겐의 철교》 라는 동명 영화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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