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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3월 7일] 1965년, 흑인 투표권을 주장하던 시위대가 백인 경찰들로부터 공격당하다.

김종현 | 기사입력 2009/03/07 [09:48]

<오늘의역사> [3월 7일] 1965년, 흑인 투표권을 주장하던 시위대가 백인 경찰들로부터 공격당하다.

김종현 | 입력 : 2009/03/07 [09:48]

1965년 3월 7일,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의 참정권을 주장하며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에서 87km 떨어진 몽고메리로 행진하던 시위대가 백인 경찰대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남북전쟁 종전 후 미국 남부 지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했다. 그러나 연방군이 1877년 이후 철수하면서 다시 옛 노예주들의 의회는 백인들이 장악했고, 잇달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참정권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후 약 50여년 동안 옛 노예주들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치 참여는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남부를 기반으로 한 민주당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쏠리기 시작한 이후 1950년대부터 흑인 인권 향상과 인종 차별 폐지, 투표권, 참정권을 주장하는 흑인 인권 운동이 고조되었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었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거부 운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로자 리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에게 백인 운전사가 백인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지시했으나, 파크스는 그 지시를 거부했고, 백인 경찰이 그녀를 체포한 사건이다. 사건에 분노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382일 동안 버스 거부 운동을 벌였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 운동에 관여하면서 그가 유명해진 것이다. 결국 미국 연방대법원은 공공버스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구분했던 법률을 위헌으로 판정하기에 이르렀다.

1965년 3월 7일에 벌어진 미국판 "피의 일요일" 사건은 몽고메리에서 서쪽으로 87km 떨어진 셀마에서 시작되었다. 셀마는 앨라배마 주 달라스 카운티의 큰 마을이다. 당시 달라스 카운티 인구의 57%가 흑인이었지만, 유권자 등록은 1% 미만에 불과했다.

이들 흑인 인구의 80% 이상이 빈곤선 이하에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멜리아 로빈슨과 샘 로빈슨 부부, 그리고 그들의 아들 브루스 로빈슨은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자 댈라스 카운티 유권자 연맹( Dallas County Voters League, DCVL)을 결성하고 댈라스 카운티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유권자로 등록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 당시 셀마에서는 차별과 협박으로 말미암아 셀마 인구의 대략 반수를 차지하는 흑인은 투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운동은 백인이 장악한 의회와 KKK단, 지역 경찰 등에 의해 봉쇄되었다. 1964년 6월 6일, 존 루이스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50명이 유권자 등록을 하려 하자 클라크 보안관이 그들을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3일 뒤인 6월 9일, 제임스 하레 판사는 인권 운동 기구나 지도자의 후원으로 3명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억압 조치들이 계속되던 중 1965년 2월 18일, 한 백인 경찰관이 인권 시위 도중 어머니를 보호하려 했던 지미 리 잭슨에게 총을 쏘는 사건이 벌어졌다. 8일 후, 지미 리 잭슨은 결국 셀마의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에서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멜리아 로빈슨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짐 베벨(Jim Bevel), 호시아 윌리엄스(Hosea Williams)를 비롯한 많은 저명한 미국 인권 운동가들을 셀마로 불러들였고, 이들과 함께 시위 행진을 주도했다.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벌어진 행진은 모두 3번 일어났다. 3월 7일에 1차 행진, 3월 9일에 2차 행진, 3월 21일에 3번째 행진이 있었다.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사건은 3월 7일에 있었던 첫번째 행진때 일어났다.

인권 행진에 참여한 600명의 시위대는 셀마를 출발해 80번 고속도로를 따라 몽고메리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2월 18일의 사건과 함께 행진을 통해서 그들의 권리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몽고메리에 위치한 주의회에 보여주고자 했다.몽고메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에드먼드 피터스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의 몽고메리쪽 편에는 이미 백인 주립 경찰대가 다리를 봉쇄하고 있었다. 사실 짐 베벨이 짠 시위대의 계획은 2월 18일에 있었던 발포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앨라배마 주 주지사 조지 월래스(George Wallace)와 면담하는 것이었다. 행진 과정 또한 어디까지나 비폭력을 지향했다. 그러나 백인들로 구성된 주립 경찰대는  600여명의 시위대를 최루가스와 곤봉으로 마구 공격했다. 월래스 주지사 역시 시위대의 행진을 공공안전에 대한 위협이라며 비난했다. 결국 이 날 시위대는 몽고메리로 들어서지 못했다.

두번째 행진은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하여 이틀 뒤인 3월 9일에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킹 목사의 부름에 응하여 시위와 행진에 참가했다. 이날 참가한 시위대는 대략 2,500명 정도였다. 이날 저녁,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위에 동조하여 시위애 참가한 백인들 중 제임스 리브(James Reeb)가 인종차별주의자 백인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셀마의 병원들은 리브의 치료를 거부했고, 결국 그는 3월 11일에 사망했다.

마지막인 세번째 행진만이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까지 할 수 있었다. 행진이 계속되자 당시 존슨 미국 대통령은 흑인투표권 법안을 통과시킨다. 인종 차별 문제가 심각한 곳은 연방에서 직접 작성한 선거인 명부와 연방에서 파견한 선거 관리인이 파견되도록 한 것이다.

현재 셀마-몽고메리로 이어지는 행진로는 이후 셀마 몽고메리 국립 역사로(Selma to Montgomery National Historic Trail)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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