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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3월 8일] 1869년, 프랑스 음악가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사망하다.

김종현 | 기사입력 2009/03/08 [09:46]

<오늘의 역사> [3월 8일] 1869년, 프랑스 음악가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사망하다.

김종현 | 입력 : 2009/03/08 [09:46]

1869년 3월 8일, 프랑스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서《환상 교향곡》으로 유명한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Louis-Hector Berlioz, 1803년 12월 11일 ~ 1869년 3월 8일)가 사망했다.

"표제 음악"(Program music)이라는 새로운 극적인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한 베를리오즈는 음악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며,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심지어 피아노를 칠 줄도 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1826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작곡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하면서, 베를리오즈는 음향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악기 사용법을 연구했으며, 이때 그가 작성한 악기 사용법은 훗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증보했고, 지금까지 이 분야의 고전으로 쓰인다. 문학에 눈을 뜬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의 문학 소질은 당대 독일 작가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1776년 ~ 1822년)과 비교되기도 했다.

베를리오즈는 음색과 효과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음악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음악원 시절 개발한 문학 자질을 이용하여 문학과 음악을 넘나들며 작곡 활동을 했다. 악기의 음색과 효과를 최대한 이용하여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한 것이다) 환상과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를 위해서 베를리오즈는 대규모의 관현악단을 조직했다. 베를리오즈의 데뷔작이자, 대표곡인 《환상 교향곡》의 경우 문학적 사실 묘사를 교향곡의 각 부분과 연결했다. 《환상 교향곡》외에도 《파우스트의 여덟 장면》(1828년 ~ 1829년), 《이태리의 해롤드》(1834년), 《로미오와 쥴리엣》(독창과 합창, 1839년), 《죽음과 승리의 대 교향곡》등도 마찬가지다. 그가 작곡한(그러나 공연에서는 실패한) 오페라들도 이런 양식을 따르고 있다. 감정을 악기의 음색과 교향악의 연주과정과 결합하여 자신의 생각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적을 너무 많이 만든 탓에, 베를리오즈가 프랑스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죽은 후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생전에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  와 절친한 친구들 중에는 프란츠 리스트, 펠릭스 멘델스존, 프레데리크 쇼팽 등이 있었다.

1830년, 로마상 콩쿠르에서 1830년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로 대상을 받은 후, 베를리오즈는 음악가로서 유명해졌다. 1839년 오페라《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가 참패하면서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베를리오즈는 1842년부터 독일, 러시아, 체코, 헝가리 등을 오가는 음악 연주 여행을 떠났다. 독일 여행 중에는 유명한 《로마의 사육제 서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경제 문제로 궁핍한 삶을 보내야 했고 (1856년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서 생계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 프랑스 음악계와 갈등이 계속되던 끝에 1869년 3월 8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베를리오즈가 남긴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관현악곡
《웨이벌리 서곡》, 《종교재판관 서곡》, 《환상 교향곡》, 《리어왕 서곡》, 《로브로이 서곡》, 《로마의 사육제 서곡》, 《해믈릿의 종막을 위한 장송행진곡》, 《해적 서곡》, 《트로이 행진곡》, 《이탈리아의 해롤드》, 《꿈과 카프리치오》

2.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 《트로이 사람들》,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

3 관현악 가곡
《독창곡 에르미니》,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아름다운 나그네》, 《부르타뉴의 젊은 양치기》, 《여죄수》, 《여름밤》, 《자이드》, 《오필리아의 죽음》

4 글과 저서
《회상록》, 《관현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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